설교요약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0260222)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5-19)
베드로의 삶에는 헌신과 배신, 믿음과 불신, 순종과 불순종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실패한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제자로 세워지는 회복의 은혜를 구하고자 한다.
베드로의 실패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실패의 연속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배에 있으면서도 풍랑을 두려워하였고(막 4:38-39),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에서도 누가 더 높은지를 두고 다투었다(막 9:33-24).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는 깊은 잠에 빠졌고(막 14:37), 예수님이 잡히시자 모두 도망갔다(막 14:27).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제자들 중에는 그분의 시신을 거두는 자가 없었고, 부활하신 주님이 세 번이나 나타나셨으나 그들은 고기를 잡겠노라며 옛 생활터로 돌아갔다(요 21:3).
이러한 제자들의 실패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있었다. 그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요한과는 끊임없이 경쟁하였고,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물에 뛰어들었으나 의심함으로 물에 빠졌다(마 14:30).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반란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요 18:10). 그렇게 저항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실제로 잡히시자 도망갔고, 예수님의 빈 무덤에 가장 먼저 들어가 보았으나 그분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요 20:1-10).
변화된 베드로: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으로
그런데 우리는 사도행전 첫 장을 펼치자마자 전혀 다른 베드로를 만난다. 눈에 띄는 베드로의 가장 큰 변화는 담대함이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그가 사도행전에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당당하게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변화는 그가 더이상 연약하고 실패한 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사도로 오순절의 설교를 통해 수천 명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고, 병자를 치유함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드러냈다. 그리고 고넬료를 통해 이방 선교의 문을 열면서 교회의 중요 문제를 결정하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내고 있었다.
도대체 베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베드로의 변화를 이끈 중요한 사건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래서 항상 흔들리는 우리도 어떻게 예수님의 참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알아갈 것이다.
나는 이 예수를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의 실패 중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대제사장 뜰에서 일어났다. 잡히신 예수님을 멀리서 따라오던 베드로는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알려 하여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을 쬐고 있었다.
그때 베드로를 알아본 한 여종이 ‘너도 예수와 함께한 사람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게 된다. 계속된 추궁 끝에 위기를 모면하고자 그는 예수의 제자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까지 감행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막 14:71).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예수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던 사람이다. 그런데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그의 고백이 무색하게 재판정도 아닌 대제사장 집 뜰에서 여종과 사람들을 향해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게 된다.
비단 베드로만 이렇게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3년 동안 받고 놀라운 기적을 눈으로 보았던 제자 중 그 누구도 나는 예수의 제자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성경은 실패한 제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요 20:19).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먼저 행하신 일은 이렇게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것이었다. 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빌라도나 헤롯, 유대의 제사장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을까? 만약 로마의 황제나 빌라도, 헤롯과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면 복음은 더 빠르게 전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찾아오셨다.
지금도 그러하다. 주님은 권세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기보다는 우리와 같이 실패하고 무너진 자들을 찾아오신다. 실패한 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여전히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베드로다. 그는 예수를 배반하였다는 죄책감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성경은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한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3).
갈릴리 호수에서 베드로를 만났을 때 예수님은 그를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얻는 사명자로 부르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3년 동안 주님과 함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물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으로의 복귀도 쉽지 않았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갈릴리 호수의 빈 배: 실패한 인생의 밤
무엇이 베드로를 이렇게 절망하게 만들었는가. 주님을 만났고 은혜를 받았고 능력도 입었던 베드로를 이처럼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주님이 잡히시던 밤, 대제사장 뜰에서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를 부인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 죄책감으로 인해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도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도망치게 되었다.
이제 베드로는 소망 없어 보인다. 그는 주님 앞에서 실패자였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에 밤새 떠 있는 빈 배는 그의 인생이 세상에서도 실패하였음을 보여준다.
우리 인생에도 이러한 어둠의 밤이 있다. 은혜를 누리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지만 어느 순간 주님을 부인하는 실패의 자리가 있다. 다시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주님의 부르심이 있지만 그 실패로 인하여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하다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돌아간 세상에서도 우리는 실패를 경험한다.
날이 새어 갈 무렵,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는 고기를 얼마나 많이 잡았는지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사명을 떠나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밤새 고기를 잡으려 했던 제자들에게 그들의 수고로 어떤 열매를 얻었는지 물으시는 것이다. 네 뜻대로 살아가는 인생에 열매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주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다. 밤새 고기를 잡았던 제자들이 오른편에 그물을 안 던졌을 리 없다.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던져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들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지자 수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주님이시라”는 요한의 말에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 물이 얼마나 깊은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무작정 물로 뛰어들어 주님께로 달려갔다. 그에게는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복의 모닥불 앞에서
육지에 올라와 보니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고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이 순간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들은 주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배반자였고 실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손수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여기서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숯불’을 피워 놓으셨다는 사실이다. 숯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쓰라키아’는 성경에 딱 두 번 나온다. 한번은 요한복음 18장, 대제사장 집 뜰에 피워져 있던 그 숯불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곳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피워 놓은 숯불이다.
주님은 왜 숯불을 피워놓으셨는가. 주님은 한 사람을 기다리셨다. 숯불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 공통적으로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 바로 베드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회복은 고백으로 완성된다
이제 주님은 말씀으로 베드로를 회복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성격 급한 베드로는 답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동일한 질문을 한 번 더 하신다. 베드로는 동일하게 답한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물으신다. 성경은 그때 베드로가 근심하였다고 기록한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을 듣는 순간 베드로의 머릿속에는 한 장면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추위를 피하고자 사람들이 숯불 앞에 모여들었고 자신도 그 가운데 있었다. 그때 대제사장의 여종이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라고 말했고 자신은 그를 모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주까지하면서 예수를 부인하였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자신이 무너졌던 그 자리가 떠올랐다.
예수님께서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은 베드로의 이 세 번의 실패를 베드로가 기억하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안쓰라키아’ 불 앞에서 세 번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에게 동일한 ‘안쓰라키아’를 피워 놓고 세 번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셨다. 주님은 배신의 안쓰라키아를 용서와 회복의 안쓰라키아로 바꾸셨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 회복의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주님을 두 번 사랑한다고 답할 때까지 그는 예수님이 자신이 주님을 부인한 일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 번째 질문을 받고서는 주님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라며 자신의 실패를 고백한다.
자신이 주님을 배반했다는 것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더 괴로웠던 베드로가 이제 모든 죄책감의 무게를 내려놓고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주님, 제가 주님을 배반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제 마음은 더욱 괴롭습니다.“
베드로의 세 번째 사랑 고백을 받으신 후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나를 따르라’라며 사명을 주셨다. 숯불 앞에서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를 다시 숯불 앞으로 부르셔서 세 번 부인하던 베드로에게 세 번의 질문을 통해 사랑을 회복시키셨다. 그리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사명의 길로 그를 인도하셨다.
맺음말
자신의 생명을 위해 대제사장 뜰에서 예수를 부인하던 베드로를 무엇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드리는 제자가 되게 하였는가. 그것은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과의 만남이었다. 이 만남을 통해 베드로는 다시금 소명을 회복하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었다.
우리도 세상 가운데 넘어지고 무너진다. 주님께 너무 죄송하여 도망가고 싶은 때가 있다. 회복은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러분의 인생이 무너진 곳은 어디든지 피하지 말고 그 자리로 가서 주님의 회복을 경험하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면 우리의 삶도 회복된다. 그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회복하시는 주님을 만남으로 주어진 사명을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