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가장 가까이, 그러나 먼 곳으로
가장 가까이, 그러나 먼 곳으로(20260308)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 12:1-8)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는 마음의 가장 큰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마음 아픈 일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으셨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했고 군중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조롱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때리고 욕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모든 사람의 비난과 조롱, 폭력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까지도 사랑과 용서로 품으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만큼은 매우 엄중한 말씀을 하셨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대상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였다. 요한복음은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이렇게 적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70-71).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가룟 유다를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하셨을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목적과 계획으로 가룟 유다를 선택하셨는지는 모두 알 수는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의 유다 선택은 마치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한 그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건조차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지셔야 할 십자가의 길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 속에서 이미 예비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배신도 그 십자가의 길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가룟 유다의 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유다는 자신의 탐심과 죄로 인해 예수님을 배신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결국 유다 자신이 져야 한다. 가룟 유다의 비극은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돈을 위해 예수를 팔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거운 경고를 준다. 가룟 유다만 이렇게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발을 잘못 들어서면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으나 주님을 버리는 배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유다의 삶을 통해 어떻게 해야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주님이 주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배우려 한다.
가룟 유다의 배경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중 유일하게 갈릴리가 아닌 유대 지역 출신으로, 그의 고향은 유대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는 유대 지역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다. 갈릴리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회적으로도 하층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로마는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지역의 갈등을 이용하여 통치하였다. 이들이 서로 연합하지 못하고 경쟁 관계에 있도록 유대 지식인들보다 배운 것이 적은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을 등용하였다. 특히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유대 지역보다 더 큰 특권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역차별 정책은 로마의 예상대로 지역 갈등을 가져왔고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무시하며 연합하기를 꺼려했다.
이러한 지역 갈등은 예수님 제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다가 재정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아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지식층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유대의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이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가룟 유다의 무너진 인생
유다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는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에도 긍정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점차 유다의 인생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1)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가장 추한 이름으로
유다의 이름 앞에 지명을 붙여 ‘가룟 유다’라고 칭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다른 유다들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제자가 있었지만 유독 이 사람에게만 가룟이라는 지명을 넣어 부르고 있다.
유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예후다’에서 왔으며 이 단어의 의미는 ‘여호와를 찬양하다’, ‘하나님께 감사하다’이다. 이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야곱의 아들 가운데 네 번째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이다.
야곱의 아내 레아는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의 비참한 삶에 함몰되지 않고 이제는 내가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겠다며 아들의 이름을 유다로 짓는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창 29:35).
구약에서 유다의 이름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고 후에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가장 강력한 지파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유다의 자손 가운데 다윗이 세운 나라의 이름으로, 남유다라는 국가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유다 왕국이 있었던 지역을 유대라는 지명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유대인이라는 민족을 의미하는 단어로 오늘까지 사용되고 있다.
유다라는 이름이 하나님 언약의 중심이 되는 지파, 국가, 사람, 지역, 민족을 의미하는 굉장히 좋은 이름이었다. 예수님이 자라신 곳은 갈릴리 나사렛이었지만 그분이 태어나신 곳은 언약의 땅 유대지역이었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히 7:14).
그만큼 유다라는 땅은 정통성이 있었다.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은 그 이름답게 살았다.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 유다는 유다서의 저자이고, 예수님의 형제 유다도 모두 주어진 사명을 이룬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직 가룟 유다만이 이 귀한 이름을 가장 저주 받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우리 각자에게는 이름이 있지만 우린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 거룩한 백성, 주님의 몸된 교회의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 이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이름을 지키는 것이 삶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길이다.
2) 가장 귀한 사명을 가장 탐욕스러운 도적질로
유다는 자신의 이름을 지키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유다의 인생은 파멸의 길로 가게 되었는가. 이는 하나님이 주신 이 이름에 자신의 욕망을 넣어 이 이름의 사명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다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보여주는 한 사건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4-6).
여기서 ‘훔쳐가다’라는 말은 ‘돈을 표시 안나게 살며시 가져가다’의 의미다. 유다의 타락은 작은 도둑질에서 시작되었다. 유다는 공동체의 재정을 맡고 있었기에 자신이 필요할 때 그 돈 중 일부를 가져다 사용했던 것이다.
어떻게 유다는 3년간 예수님과 함께하고, 예수님의 모든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였으면서도 스승을 팔 수 있었을까? 죄는 이렇게 작은 것에서 시작되어 큰 것으로 성장한다. 작은 탐심을 가볍게 여기면 그것이 자라나 결국 큰 죄가 된다. 하나님께서 양심을 깨우쳐 주실 때 그 자리에서 돌이켜야 한다.
가룟 유다도 작은 탐심을 방치하고 결국 더 큰 죄에까지 나아갔다. 가장 귀한 사도의 사명이 가장 탐욕스러운 도적질로 타락한 것은 작은 도적질을 합리화하면서 그 죄가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죄는 이렇게 우리의 사명을 탐욕의 죄악으로 바꾸어 예수님마저 파는 마귀의 앞잡이로 만들어버린다.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 가장 먼 곳으로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셨다. 떡 한 조각을 적셔 주는 그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떡 한 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 있던 제자들 중 아무도 이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요 13:2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요 13:26-29)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왜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을까? 이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향해 경고하시면서 그가 돌이킬 기회를 한 번 더 주신 것이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유다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셨으나 유다의 반응은 냉정하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 13:30).
유다는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하였으나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고 어둠으로 나아갔다. 포도주를 찍은 떡을 받아들고는 돌이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짓기로 결단하고 주님을 떠났다. 그리고 군대와 함께 다시 돌아온다.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눅 22:47-48).
유다는 단순히 예수님을 팔았을 뿐 아니라 예수를 고발하는 모든 거짓 증거의 증인이 되었다. 가장 가까웠던 제자의 고발이기에 가장 확실한 증인이고 증거가 되었다. 결국 유다는 가장 가까운 예수님의 제자에서 예수님과 가장 멀어진 배신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향해서 경고하신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빵을 적셔주며 돌이킬 기회를 주신다. 그렇게 경고받을 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말씀에 찔림이 있다면 희망이 있다. 주님이 아직 여러분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회개의 시간이 영원하지는 않다.
마태는 예수를 팔고 난 이후 유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3-5).
유다에게도 죄에 대한 자각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돌아올 기회가 이미 지났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경고를 들어야 한다. 우리의 회개와 돌이킴에도 때가 있다. 그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할 때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만약 말씀이 주는 기회를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죄를 지으면 죄악의 깊은 밤으로 나아가게 된다.
맺음말
우리는 가룟 유다와 같이 죄의 길로 나아가 멸망할 수 있는 연약한 자이다. 가장 고귀한 사명을 가장 탐욕스러운 도적질로 바꿀 수도 있다.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우리의 삶을 주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가는 배신자의 삶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러한 연약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죄의 길에서 돌이켜야 한다. 추한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돌아서라. 주님이 맡기신 고귀한 사명을 나의 작은 탐욕을 채우는 도적질로 무너뜨리지 말라. 회개하고 주님께로 나아오라.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