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동역과 패역의 갈림길에서
동역과 패역의 갈림길에서(20260315)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행 5:1-6)
인간은 윗세대를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이렇게 위로 위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결국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 이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창세기 1장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인도해 오셨는지를 설명하는데,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셨다고 기록한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삼위 하나님이 서로 동역하심으로 이루신 것이다. 삼위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다른 직분을 가지셨으나 항상 사랑의 연합 가운데 한 가지 일을 도모하셨다. 이처럼 인류도 사랑으로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도록 부름받았다.
이 동역이 가장 잘 반영된 곳이 최초의 인류였던 남자와 여자의 동역이다. 아담과 하와가 남편과 아내의 자리에서 서로 동역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인류의 동역은 인간관계가 확장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가정이 이 동역의 첫 번째 장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동역의 관계이고, 형제자매 사이도 그렇다. 그리고 가정을 벗어나면 이웃과의 동역이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동역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것은 곧 죄를 짓는 패역의 길로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좋은 동역과 무너진 동역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삼위 하나님의 동역을 이루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길 바란다.
신약 성경에는 부부가 함께 등장하는 모습이 흔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두 부부를 만나게 된다. 한 부부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잘 감당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이고 다른 한 부부는 한마음이 되어 교회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다. 우리는 이 두 부부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동역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이러한 동역이 무너질 때 삶의 패역이 찾아온다는 것을 경고를 받으려 한다.
동역을 이룬 부부 사역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먼저 바울과 동역을 이루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살펴보자.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고린도에서 만났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 18:1-3)
성경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인생의 배경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아굴라는 본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로마에 살고 있었는데, 모든 유대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에 따라 고린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특별히 그의 아내인 브리스길라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의 명문가인 ‘브리스가’ 가문의 귀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이 부부의 흥미로운 점은 이들은 바울이 전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이 이 부부를 만났을 때 이 두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알고 있었다. 더 나아가 어떤 학자들은 이들이 로마 교회를 처음 세운 사람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성경 많은 곳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라는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점은 바울과 이 부부는 직업이 같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천막을 만드는 일을 같이 하면서 동역을 시작하였다. 당시 천막 만드는 일은 가죽을 다루는 직업으로, 단순한 노동자라기보다는 가죽공예품을 제작해서 판매하는 무역상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한 해석이다.
어쨌든 바울과 이 부부는 서로 동역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사역은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가는 길에도 지속된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행 18:18-19)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에베소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한동안 같이 머물었다. 그리고 후에 안디옥으로 떠날 때 에베소 교회를 이 부부에게 맡겼다. 자신이 개척한 에베소 교회를 맡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바울이 이 두 사람을 얼마나 신뢰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볼로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행 18:24-26).
성경에 능통하고 언변에 좋은 아볼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련시켜 고린도 교회 지도자로 파송한 사람이 이 부부였다. 이들은 다음 세대를 키우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훗날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서신서에서 이 두 사람을 언급하며 이렇게 칭찬한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롬 16:3-5)
과거 어느 시점에 이 두 사람은 바울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했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의 동역자들이었다.
또한 바울의 편지는 이 두 사람이 로마에서 그들의 가정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가 지역교회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
바울이 말년에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부부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바울과 이 부부의 동역은 그때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딤후 4:19).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과 함께 선교와 교육, 교회 개척을 함께하며 초대교회를 세워갔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동역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역자와 동역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여러분의 가정이 또 하나의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동역자의 모습이다.
패역으로 무너진 부부: 아나니아와 삽비라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또 다른 부부를 만난다. 베드로에 의해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 속에서도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부흥의 결과, 자신의 물건을 서로 나누며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회복이 일어났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1-35)
이렇게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져 가는 과정에서 행동이 비교되는 두 부류가 등장한다. 한 부류는 훗날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한 바나바이고, 다른 부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이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행 4:36-5:2)
성경은 의도적으로 정직한 바나바와 속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비교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것을 먼저 생각함으로 일부만 공동체 앞에 내어놓았다. 그리고 동역은 깨어졌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행 5:3-5).
아나니아를 향한 베드로의 꾸짖음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를 꾸짖는 하나님의 그것과 유사하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초대교회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무너뜨리려 하였기에 죽음의 맞이하게 된다. 베드로는 이들이 속인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며 이들을 크게 질책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삽비라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행 5:9).
이 본문을 잘못 해석하면 성도들에게 무조건적인 헌신이나 헌금을 강요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을 악랄한 사채업자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땅의 일부를 감춘 것에 대한 단순한 죄값이 아니다. 이제 막 회복된 공동체에 자신의 것을 먼저 생각하는 죄, 하나님은 이 거룩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이들에게 죽음을 내렸다.
그래서 이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해치는 첫 번째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막 회복된 예루살렘 공동체, 에덴동산처럼 서로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삶을 나누는 그 동역이 막 이루어지려는 하는 때에 ‘자기의 것을 감추고’ 일부만 내어놓는 모습은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내가 되리라.” 그리고 바벨탑처럼 하나님보다 자신의 존재를 더 드러내고자 하는 그 마음이다.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우리에게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습이 있다. 모든 죄의 시작은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관점으로 상황을 보고 나의 관점으로 공동체를 보면 나의 모든 욕심을 합리화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거룩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패역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맺음말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의 아름다운 동역을 통해 에베소 교회와 로마 교회를 세우는 놀라운 선교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것을 주장하며 하나님과 교회를 속임으로 패역된 삶으로 마치게 되었다. 우리도 동역과 패역의 갈림길에 서 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곳에 주님의 말씀이 흥왕해가고 있는가? 교회가 세워져 가고 있는가? 다음 세대가 자라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동역자들인지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