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
사람을 세우고, 교회를 살리는 사람
사람을 세우고, 교회를 살리는 사람(20260322)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19-26)
우리는 항상 1등, 주인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기억하는 인물도 사건의 중심에 있던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을 통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의 조연, 숨은 조력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앞으로 나설 충분한 자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세우고 자신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더욱 귀하다. 그가 바로 바나바이다.
긍휼의 사람 바나바
우리가 흔히 ‘바나바’라고 부르는 초대교회 사역자의 본명은 ‘요셉’이다. 바나바는 사도들이 그의 성품과 사역을 보고 붙여준 별명과 같은 이름이다. 그는 요셉이라는 이름, 그리고 바나바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먼저 요셉이라는 이름은 ‘주인공 옆에 추가된 사람(돕는 자)’이라는 뜻이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야곱의 자손들을 생존케 하고 자신은 사라진 것처럼, 신약에서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생존을 위한 배경이 되었던 것처럼 바나바도 그의 본명인 요셉처럼 주인공이 아닌 조연의 삶을 살았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아람어에서 유래하였는데, 아들을 의미하는 ‘바르’와 선지자를 의미하는 ‘느보’의 합성어다. 그래서 문자적인 의미로는 ‘예언의 아들’, ‘말씀의 아들’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이 이름을 ‘위로의 아들’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으로 백성을 위로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위로가 이 사람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요셉 곧 바나바가 등장하는 첫 장면은 예루살렘 교회가 말씀의 은혜를 받고 자신의 소유를 나누며 서로 섬기던 때였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6-37).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바나바라는 사람의 배경이다. 그는 이방인의 땅인 구브로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으며,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밭을 팔아 교회에 바쳤다는 사실로 보아 사도들로부터 상당한 신뢰와 인정을 받는 인물이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조카 마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나눈 곳도,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난 곳도 마가의 집이었음을 감안하면 바나바의 가문은 상당히 유력한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로의 사역자 바나바
바나바의 두 번째 등장은 바울의 극적인 회심 사건과 관련된다. 아무도 바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던 그때 바나바는 그의 회심을 믿어준 유일한 사람이었고 공동체가 거부하던 바울을 교회 공동체 안으로 이끌어준 사람이었다. 사도들과 성도들이 바울에 대한 의심을 풀고 그를 믿었던 이유는 그들이 신뢰하던 바나바라는 사람이 바울의 회심을 보증했기 때문이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행 9:26-27).
바나바는 이렇게 사울이라는 사람을 복음 사역자로 인정하고 믿어 줌으로 훗날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준비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낙심한 한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위로하여 복음 사역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바나바를 왜 위로의 아들이라 불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사건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이방인 선교사
바나나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몰아닥친 핍박과 함께 세 번째로 등장한다. 이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흩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를 계기로 복음은 유대 밖으로 퍼져나갔다. 그 가운데 일부 성도들이 안디옥에 이르렀고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곧 용기를 내어 헬라인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예배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다민족 교회, 안디옥 교회의 시작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이, 스데반의 죽음이 고난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복음 확장의 통로로 사용하셨다.
안디옥 교회의 이러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졌고 사도들은 그 일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신뢰하던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방인이 복음을 믿고 함께 예배하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바나바로 하여금 그곳에 머물며 안디옥 교회를 섬기게 하였다. 이렇게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이방인 선교사가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 11:22-24).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한 것은 기독교가 유대라는 울타리를 넘어 온 민족에게로 확장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일을 계기로 바나바가 사울을 복음 사역자로 섬길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울은 그의 고향 다소에 피신해 있었다. 고향에서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사울을 다시 사역지로 부른 사람이 바로 바나나였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바나바가 이방인을 위한 복음 사역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다소에 있던 사울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힘을 다하여 안디옥 교회를 섬겼고 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예수의 참체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다.
바나바는 비록 사도는 아니었지만 안디옥에서 목회하면서 그 교회를 예루살렘 교회에 맞먹는 교회로 세울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사울과 동역하며 안디옥 교회를 섬기는 길을 택했다. 사울이 가진 율법적 지식과 자신의 목양적 마음이 함께할 때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바나바는 이처럼 자신의 것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신다. 자기 자신의 자리와 권세,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주님이 맡기신 사역을, 하나님의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사용하신다.
세계 선교의 첫걸음을 함께하는 바나바와 바울
안디옥에서 안정적으로 목회를 감당하던 두 사람은 성령의 명하심에 따라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로 세워져, 아시아와 유럽을 향한 세계 선교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성경에서 두 가지 큰 변화가 나타난다.
먼저 사울이 이름이 바울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이었기에 이방 선교에 보다 적합한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행 13:9).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부르던 이름이 이제 ‘바울과 바나바’로 순서가 바뀌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는 바울이 선교의 주도권을 가지고 이방 선교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나바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첫 이방인 사역자였고, 안디옥 교회의 첫 목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 그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스스로 물러났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심지어 교회에서도 우리는 자신이 가진 작은 특권을 붙잡으려고 한다. 남보다 앞서고 싶어하고 더 높아지고 더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것들을 손에 붙잡고 있기에 오히려 비슷한 사람들끼지 자리와 권세를 다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다툼이 복음의 씨앗이 되어
1차 선교여행을 통해 많은 교회를 세우고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와 교회를 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1차 선교여행 이후 바울은 자신들이 이전에 방문했던 교회를 다시 찾아가 돌아보자고 바나바에게 제안한다. 그런데 이 제안으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 15:36-41)
두 사람은 1차 선교여행 때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갔던 마가를 이번에 데리고 갈 것인가를 두고 크게 다투었다. 바나바의 입장에서는 실패한 마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보다 효과적이고 책임 있는 선교를 위해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기를 거부하였다. 두 사람은 이에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북서쪽으로 향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남서쪽 구브로로 떠난다.
이들의 다툼을 두고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기보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통해 실라와 디모데 같은 새로운 동역자들을 만났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또 다른 바울로 세워, 훗날 바울도 그를 사랑하는 동역자로 여기는 귀한 사람으로 키워냈다. 비록 인간의 연약함으로 다툼은 있었지만 이들의 분열을 오히려 복음의 확산과 또 다른 사역자를 키워내는 계기가 되었다.
맺음말
우리는 언제나 바울과 같은 주인공의 삶을 꿈꾼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 같은 주인공으로 뒤에는 언제나 그를 세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바나바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바나바는 조연처럼, 그리고 바울의 그림자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나바를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가장 신실한 일꾼으로 기억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길 원하신다. 우리가 자신의 기득권과 특권을 내려놓는다면 우리 옆의 한 사람을 교회의 귀한 일꾼으로 세울 수 있다. 이 부르심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길 바란다.